<新 가족의 탄생 #6>
15년의 사랑, 벅차게 Congratulation – 게이 커플 ‘승정&정남‘의 이야기
‘피가 섞이지 않아도 괜찮아.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이라면 가족이 될 수 있어.’
2006년 5월 개봉한 영화 <가족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그로부터 10년 간,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가족구성에 대한 이야기는 2006년 가족구성권연구모임부터 2013년 김조광수·김승환 부부 결혼식에 이은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이하 가구넷)의 출범, 그리고 최근 동성혼 불복 소송에 따른 심리까지 험난하지만 다부지게 계속돼 왔죠.
그럼에도 ‘종북게이’, ‘골수 페미니스트’ 등의 용어가 난무하며 혐오가 판치는 게 현실입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요원하고, 성소수자를 포함한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은 좌초됐으며, 한 지자체의 성평등기본조례에서 성소수자 관련 조항은 삭제됐습니다. 이러한 차별과 혐오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가시화를 통한 존재 드러내기와 당연한 권리 주장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이에 친구사이에서는 성소수자 가족공동체를 위한 제도적, 사회적 변화요구에 앞장서는 가구넷과 함께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담은, 성소수자 가족공동체 당사자 연재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6번째 이야기는 어느새 15주년을 맞이한, 친구사이 대표 장수커플 ‘승정&정남’의 이야기입니다!
“아들아, 그게 말이 되니? 절대 안 돼.”
지난 추석연휴,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께 한 발짝 더 다가갔다. 20대 후반부터 이어진 연이은 거짓말에 나는 지쳐갔고, 점점 집에 내려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부모님의 말씀이 잔소리가 되는 순간, 나는 입을 꾹 다문 아들이 됐다가 이제는 능숙하게 말을 돌리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고는 이제 15년간 독거하던 생활을 접고 애인과 살림을 합치려던 찰나, 고향집에 가서 “친한 형이랑 같이 살기로 했다”며 부모님께 선전포고를 했다. 이미 “결혼하지 않겠다”, “애인은 있지만 못 보여준다” 단계까지 간 마당에, 마음 맞는 사람이랑 같이 산다고 하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큰 착오였다. 흔히 말하는 결혼적령기에, 배우자를 찾아나서야 하는 마당에, 딴 사람이랑 같이 산다니, 등등의 논리를 부모님은 내세우셨고, 나를 옭아맸다.
결국은 답답해서 일찍 올라와버렸다. “그 사람이 내 애인이에요”라는 고백이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꾹 삼켰다. 닥쳐올 후폭풍이 무서워, 짐작조차 안 되는 반응이 두려워 이번에도 나는 ‘나쁜 아들’이 되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음에도 당당하게 말을 못 하고, 낙담한 마음을 애써 여며야 하는 심경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더 오래되고 안정된 선배 커플을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굴곡진 세월을 넘어 이제는 반려자로서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이들. 소소한 일상에서 소박한 삶을 꾸려나가며 어느새 15년의 세월을 함께 한 게이 커플 ‘승정과 정남’은 그렇게 곁을 내어주었다.
처음 만나고 나서 1년, 2년 하다 보니 어느새 15년이 되긴 했는데,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똑같이 늘 그냥 거기 있는 그대로 함께 했으니까요. 굳이 따지자고 하면 주변에 같이 살아온 게이 커플이나 동성 커플 중에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산 커플이 많이 없다고 들으니까 감회가 새롭기는 하죠. 남들은 하기 힘들다는 걸 그래도 15년 동안 유지해 온 거니까 저 같은 경우는 기분이 좋긴 한데, 특별한 감회는 없는 것 같아요. | 승정
우리는 원래 뭐 몇 주년이라고 따로 챙기고 그러지는 않아서요. 유일하게 기념일 챙기는 게 생일 정도죠. | 정남
먼저 올해 15주년을 맞이한 감회를 묻는 질문에 두 사람의 대답은 비슷하다. 항상 함께 해왔기에 특별하게 자축하지도 않았다는, 담담한 답변에 그들의 두터운 신뢰가 묻어난다. 어쩌면 하루하루 일상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는 연인의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싶다.
심지어 보다 보면 서로 닮은 것 같은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어땠을까. 누구에게나 처음은 특별했을 순간이기에 더 궁금했다.
이쪽 가라오케에서 처음 만났어요. 15년 전만 해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잘 없었으니까요. 친구랑 친구 선배랑 셋이 갔는데, 정남이가 들어온 순간 ‘아, 저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딱 왔죠. 사람을 만나는데 있어서는 첫 눈에 뿅 가야하는 스타일인데 완전 맘에 든 거죠. 첫인상이 순수 그 자체였거든요. 근데 중요한 건 제가 제일 싫어하는 복장이었어요. [웃음] | 승정
당시 정한 형이랑 성북구에서 같이 살던 때였는데, 퇴근하고 동네 수영장 갔다가 끝나고는 용식 형이랑 셋이 택시타고 갔거든요. 별 생각 없이 간 거라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 신고 갔었는데 거기서 만난 거죠. 사실 저는 못 봤는데 정한 형이 저기 있는 사람 괜찮다고 해서 먹던 술이랑 잔 들고 다가갔어요. 알고 보니 자기도 맘에 들었다고 해서 잘 됐죠. | 정남
그렇게 이루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당시 정남이 친구사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상황과 맞물려 친구사이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으로 이어졌다. 1997년 6월, 동성애자 차별 교과서 개정 촉구를 위해 친구사이가 처음으로 탑골공원(구 파고다공원) 앞에서 집회를 한 날 용기 있게 사회를 보고 그 다음해는 친구사이 대표를 맡을 정도로 정남은 커뮤니티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반면 그런 활동을 잘 모르고 관심이 별로 없었던 승정은 정남 덕분에 사람들을 알게 되고 성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생겼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필자 또한 애인 따라 친구사이를 나왔기에 그 기분을 잘 안다.)
그럼에도 활동에 대한 온도 차이는 존재했기에 살짝 우려가 됐다. 커뮤니티 활동이 물론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부분이지만, 그러한 차이가 두드러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승정은 정남의 활동을 잘 보조하면서 원하는 부분을 존중해주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사귄 지 1년여 후 동거를 시작한 것도 컸을 것이다.
만난 지 1년쯤 뒤에 같이 살자고 먼저 말해서 아현동에 집을 얻어 살림을 합쳤어요. 물론 그 전에 고민을 많이 했죠. 주말에 잠깐 같이 있는 거랑 아예 함께 사는 건 다른 부분이니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점도 많을 걸 어느 정도 예상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동거에 대한 환상도 별로 없었고, 그냥 내가 좋아서 사는 거라고 생각해서 특별한 건 없었어요. 서로 부딪히면서 가끔은 다투기도 하고, 참을 건 참으면서 현명하게 대처했던 것 같아요. 결혼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 승정
가사분담도 특별할 것 없이 스스로 잘하거나 하고 싶은 걸 미루지 않고 하다 보니 계획적으로 딱딱 정하기보다 그때그때 해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건 쉽지 않지만 그렇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솔선수범하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문득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다는 게 마치 이상적인 커플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성격 때문인 것도 같아요. 할 일을 미루거나 남에게 떠맡기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원래 게으르거나 하기 싫어하는, 아니면 본인 치장에 바쁜 성격이면 맞춰나가기 힘들잖아요. 살다 보니 내가 안 하면 내 애인이 한다는 생각에 먼저 하게 되기도 해요. 미루자면 한도 끝도 없으니까. 의외로 그런 것 때문에 싸우는 커플이 많더라구요. | 정남
일반 부부에게 기대되는 성 역할을 벗어나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사는 모습을 들려주는 두 사람. 같이 산다는 건 엄연한 현실이지만 그러면서도 그 현실을 맛있게 꾸려나가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인과의 동거를 앞둔 시점이라 얘기가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이제는 1인 가구가 보편화되고 비혼(非婚)이 비정상이 아닌 세상이 됐지만, 아직도 대부분 결혼적령기의 젊은 사람들은 수시로 결혼에 대한 질문과 압력을 받으며 뭇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하물며 두 사람이 동거를 결심하던 때는 14년 전, 나이도 30대 초반이었으니 그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생이나 친구들은 알고 있지만 아직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한 상황이었죠. 그에 대한 부담이 심했기에 부모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맞선을 나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상대편 여성에게는 양해를 구했고요. 그렇게 40대 초반까지는 결혼하라는 말이 이어지다가, 제가 “결혼 안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더 이상 맞선 보라고 하지 마시라. 그래도 결혼하라고 하시면 부담돼서 집에 안 내려올 수도 있다.”라고 얘기하니까 그 후 더 이상 말을 꺼내시지 않았어요. | 승정
물론 이런 상황이 있기까지는 먼저 자신의 성별 정체성/성적 지향을 확립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정남의 이야기는 ‘커밍아웃 인터뷰’에 자세히 실려 있지만, 승정의 이야기는 처음 들을 수 있었다.
어릴 때 남중, 남고를 나와서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었어요. 고향인 강원도 태백이 그때만 해도 광산촌이라, 다른 친구들은 얼굴이 까맸는데 저만 유독 얼굴이 하얬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놀리기도 하고 가끔은 성추행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는 그냥 ‘친구들이 나한테 그러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쿨하게 넘겨서 잘 몰랐죠. 그러면서 대학교 때는 캠퍼스 커플로 여자도 사귀고 했는데, 군대 가서 전역 2달 전 일이 있었어요. 다른 곳으로 전입을 갔는데, 고참들이 새로 왔다고 옆에서 끌어안고 자더라구요. 그때 깨달았어요, ’남자 품이 괜찮다‘고. [웃음] 그 사건으로 이쪽 세계에 눈 떠서 제대 후 게이 커뮤니티를 스스로 찾아 (처음엔 ‘파고다’가 아닌 ‘피카디리’인줄 알았다는) P극장으로 데뷔했죠. | 승정
▲인터뷰 중인 승정의 모습
그렇다면 정남이 가족에게 커밍아웃하기까지의 과정은 어땠을까. 커밍아웃 인터뷰에서도 밝힌 것처럼,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성 정체성 고민으로 자기 인생이 없는 듯 느꼈다고 한다. 이에 병원에 가서 우울과 관련하여 정신과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위안을 얻었고, 동성애가 질병이 아님을 듣게 됐다. 또한 가족의 지지가 필요함을 설명 들었고 가족과 얘기한 끝에 결국 30대 중반에 게이 아들로서 인정을 받았다는데. 게다가 친구사이 활동은 그 전부터 하고 있었으니 여러모로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1996년에 처음 친구사이 활동을 시작했는데, 저야 뭐 마음먹고 하겠다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다 1997년 국내 최초 성소수자 인권관련 집회(동성애자 차별 교과서 개정 촉구 집회)에 사회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얼굴이 알려지고 “쟤는 그냥 대놓고 운동권”이라는 말도 들었죠. [웃음] 암튼 그 덕분에 세력도 좀 커지고, 특히 재우랑 같이 활동하면서 우리의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목소리를 냈던 것 같아요. 커밍아웃 인터뷰도 자연스레 하게 되고. | 정남
▲‘커밍아웃 인터뷰’에 실린 정남의 모습
그런 시도가 친구사이에서는 처음인지라 여러 목소리들이 있었지만, 이듬해 처음으로 치룬 대표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돼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는 그의 전설 같은 일화가 참으로 반갑고 고맙다. 심지어 사람들이 집에 안 가고 종로 아지트(동남장 105호, 지금의 레몬트리)에서 서로 부대껴 함께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언니들의 의지와 열정이 지금의 끈끈한 친구사이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또한 그런 노력 덕분에 정남이 승정을 집에 소개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예전에도 애인을 집에 소개시켜드린 적이 있는 상황인지라, 오히려 승정이 먼저 정남에게 사귄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는 집에 안 데리고 가냐’며 푸념했다는 에피소드는 그저 부럽기만 하다. 어른들에게 붙임성이 좋았던 승정을 정남의 부모님은 마음에 들어 했고, 이제는 반려자로 생각하신다는 모습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가족이 탄생하는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각자 걸어온 길은 이렇게 겹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정남은 예전부터 커뮤니티 활동을 왕성하게 하면서 목소리를 냈고, 승정은 옆에서 묵묵히 지지하고 지켜보면서 본인의 생활을 영위했다고 하니 그 또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의 영역에서 서로를 배려한다는 건 끊임없는 애정과 신뢰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정남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어느 날 종로에서 게이바 ‘프렌즈’를 운영한다고 했을 때 특히 드러났다. 지금은 어엿한 종로의 대표 게이바가 됐지만, 처음 업소를 운영할 당시 분위기가 사뭇 달랐기 때문에 정남과 승정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도 개수는 70~80개 됐었으니까 지금 100개 정도 되는 숫자랑 비교하면 큰 차이는 안 났는데, 제일 큰 게 업소 분위기였어요. 거의 다 지하에 간판 없는 가라오케라 밖에서 보면 이게 이쪽 가게인지 몰랐던 거죠. 그래서 종로는 나이든 사람들이 주로 가고, 이태원은 젊은 애들이 간다는 얘기까지 있었던 거구요. 그러다 ‘프렌즈’ 하면서 많이 바뀌었죠. 그동안 없던 분위기의 가게라서 처음부터 손님이 엄청 많았어요. 제가 영업방식이 다르기도 했고, 워낙에 방송에 많이 나와서 사람들이 신기해하기도 했구요. [웃음] 무엇보다 여기는 안심할수 있을 것 같다는, 그리고 본인은 그렇게 못하지만 여기 오면서 지지하고 연대한다는 마음을 전해 듣기도 했어요. | 정남
다른 것보다도 업소 특성상 밤낮이 바뀌는 일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밤에 일하는 게 얼마나 사람을 축 내게 하는지 잘 아니까요. 처음엔 ‘철녀(철의 여인)’이라고 불렸던 사람인데, 밤에 일하니까 점점 힘들어하는 게 옆에서 보이는 거예요. 그게 가장 안쓰럽고, 그 외에는 뭐 알아서 잘하니까요. 평소에는 서로 같이 있는 시간도 다르고 하니 잘 때나 가끔 보구요. | 승정
이렇게 여러 상황을 승정 또한 지지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은 흔쾌히 따라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아직 커뮤니티 활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반들이 많기에, 그로 인한 견해 차이로 마음이 어긋나고 지치게 되는 커플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애정이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드러났다는 제보를 받고, 그 당시의 추억을 꺼내달라고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사무소(지금의 주민자치센터)에 보면 ‘혼인신고서’가 있거든요. 1주년 기념으로 인터넷에서 그걸 다운받아서 제가 작성하고 서로 지인한테 후견인 서명 받은 다음 액자로 만들어 선물해줬죠. 또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은 욕심에 어느 날은 그동안 쓴 시들을 모아서 책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구요. 그때 그게 한참 유행이었거든요. 세상에 두 권밖에 없는 책이었던 거죠. [웃음] | 승정
그런 게 되게 심했어요 몇 년 동안은. 세상에 없는 이벤트 다 하고. 별걸 다 만들어오고. [웃음] 그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참 좋아요. 살다보면 솔직히 싫을 때도 있잖아요. 이해 안 될 때도 있는 게 당연한 건데, 그때 보면 예전에 이렇게까지 나한테 해줬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눈 녹듯 괜찮아지더라구요. | 정남
▲승정이 정남에게 선물해준 특별한 책
이제는 특별한 이벤트를 하는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함께 하는 나날 속에서 변함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분하다는 두 사람. 누가 봐도 ‘가족’이라는 이름 외에 달리 표현하기 힘든 관계이지만, 사회는 여전히 그들을 남남으로 바라본다. 법적인 배우자가 아니기에 막상 보호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에는 와르르 무너지고, 거부당하는 불쾌함을 맛보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무엇보다 누군가가 아플 때, 옆에서 당당하게 지켜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제가 허리 디스크가 생겨 병원에 갔을 때가 제일 그랬어요. 전화로 물어볼 때는 분명 된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안 된다고 한 거죠. | 정남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요원한 숙제인 것 같아요. 숨이 꼴딱 넘어가는 상황에서 당장 수술이 필요한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법적 인정이 안 된 동성커플이라는 이유로 도움이 안 된다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가족들은 다 시골에 있는데 언제 와서 동의해주냔 말이죠. 분명 문제가 있어요. | 승정
배우자와 결혼하면서 얻게 되는 사회적 혜택도 아직은 배제 대상이다. 이는 특히 이전 1세대(마땅한 도리 없이 현장에서 인권운동을 외치며 존재를 드러낸 세대)를 지나 2세대(SNS, 게이 커뮤니티 등 다양한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세대)로 흐름이 달라지는 마당에서, 노년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1세대 성소수자들에게 절실히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함께 살면서도 정당한 가족으로서의 시민권 획득이 요원한 세상은, 과연 언제쯤 바뀌게 될까.
승정은 매주 조계사를 방문해 종교활동을 하고, 정남은 한여름에 뙤약볕에서도 정성스레 야채를 가꾸며 취미생활을 하는 게 서로의 일상이 된 지금, 두 사람이 그리는 이후의 모습은 어떠할까. 같이 살면서 좋은 날도 많았지만, 어쩔 수 없는 차별의 벽에 부딪혀 왔기에 그들의 미래앨범을 더욱 엿보고 싶었다.
처음엔 정남이가 나이 들면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짓고 살자고 했는데, 저는 농사를 못 하니까 싫다고 했죠. [웃음] 그 이후에는 깊은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계획이 있는 것도 좋은데, 그러면 그 계획에 맞춰서 하려다가 삐그덕거리거나 지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거죠. | 승정
거창하게 무언가를 꿈꾸거나 그런 건 없어요. 20주년 되면 파티든 인권운동 기금 마련이든 하면 좋지 않을까요? 우리 커플 기념일을 이용해서 결혼식 대신 기금마련 파티를 여는 거예요. [웃음] 아무튼 지금처럼 서로 건강 챙기면서 아픈 데 없이 지냈으면 좋겠구요. 친구사이 사람들도 언제나 보듬으며 잘 지내야죠. 요즘 친구사이가 다양한 소모임이나 행사 등을 통해 문화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예전에도 생각했었거든요. ‘게이인권운동단체’보다는 ‘게이인권센터’라고 해도 좋겠다고. 요즘 보면 성소수자들의 커밍아웃을 통한 활동 반경도 넓어지고 커뮤니티 내에 인식도 급변한 것 같아요. 반면 시대가 변하고 할 게 너무나 많은데도 친구사이가 몇 년째 비슷한 사업을 하는 모습은 좀 안타깝죠. | 정남
이처럼 여전히 친구사이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정남 (언니의) 조언을 새겨들으면서, 노후 대비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법적 배우자가 아닌 이상 보험·연금 수혜자나 상속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게 현실인지라, 점점 절박한 상황에 처할 수 없는 심정을 승정은 토로했다.
이것저것 혜택 못 받는 게 너무나 많아요. 세금문제, 가족수당이라든지 배우자 공제, 가족 합산 마일리지 등. 아직도 일반사회는 가족을 ‘이성 간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온전한 형태’로 인정하기에, 새삼 말할 것도 없죠. | 승정
2015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법제화 판결이 전 세계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영향을 미친 사건은 그래서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동성결혼이 그저 ‘동성 간 결합’의 의미만이 아니라, 이성애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누리고 있는 권리의 똑같은 인정으로 부각되면서 곧 ‘혼인평등’으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 또한 결혼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을까.
법제화가 된다면 당연히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죠. 결혼식하고는 별개로, 그렇게 해야 부부로서 혜택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단계적으로 생활동반자나 파트너로서의 인정 등은 거쳐 갈 수 있겠지만, 최종으로는 똑같은 권리를 누린다는 측면에서 결혼을 통한 법적 인정이 되어야한다고 봐요. 어찌 보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다 선례죠. [웃음] 열심히 달려온 끝에 산 너머에 무지개가 있음을 알게 되고, 반면 그 산 너머에 또 다른 산이 있는 알게 되는 것처럼, 이성애자들이 누리는 법적 권리를 성소수자들도 똑같이 누릴 수 있다고 해서 그걸로 끝은 아닐 거예요. 1차적인 목표는 그들과 동등한 권리지만, 그때 되면 새로운 목표들이 생기겠죠. | 정남
이렇게 아직 많은 사람들이 걷지 않은 길을 두 손 맞잡고 걸으며 선례를 남기는 두 사람. 문득 ‘혼자 꾸는 꿈은 그냥 꿈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향후 반려자를 만나 함께 살기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조언을 부탁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동거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거든요. 그러기에 상대방을 존중해주고 이해해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저 사람도 나처럼 사랑해주길 바라거나, 내가 하는 만큼 보답을 원할 수 있잖아요. 물론 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을 변화시키려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배려해주고 나를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오래 가는 것 같아요. | 승정
너무 정답을 얘기하네요. [웃음] 사실 저에게 제일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함께 지낼 수 있느냐”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관계가 특별하거나 애정이 남달라서는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오래전에 가족을 비롯한 모든 지인들에게 커밍아웃을 했고, 배우자를 소개시켜주고, 서로 자연스럽게 왕래를 하고 지내다보니 저를 비롯해서 지인들도 우리의 관계를 이성애자들의 결혼생활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어요. 대다수의 이성애자들도 연애와 결혼생활은 다르잖아요. 연애할 때는 사소한 이유로 헤어지기도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는 그런 연애생활과는 일정 정도 선을 긋는 경향이 있어요. 책임감도 더 생기고요. 우리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살다보면 상대방이 미워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장기적인 연애와 결혼생활을 꿈꾼다면 이런 순간들을 잘 극복해야할 것 같아요. 지내다보면 분명 권태기도 있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도 보이고 연애 초기에는 느끼지 못했던 좋은 감정들도 많이 생기더라구요. | 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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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냥 나 그 형이랑 같이 살기로 했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 한 번 더 통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몇 번의 문자와 전화까지 동원한 엄마의 설득을 나는 끝내 무마시켰다. 죄송한 마음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다.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직도 내가 애인과 ‘별 문제 없이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다만 승정과 정남 커플의 이야기를 들으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기에 나도 애인도 든든한 옆지기로 함께하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新 가족의 탄생> 연재 순서
#01 사랑에 차별이 있나요 – 레즈비언 부부 ‘낮잠과 유다’ 이야기
#02 무지갯빛 마음이 모여 사는 곳 – ‘무지개집’ 사람들 이야기
#03 별처럼 반짝이는 인연을 맺다 – 게이 부부 ‘플플달 제이&크리스’ 이야기
#04 닮은 듯 다른, 믿음 안의 사랑 – 퀴어 커플 ‘도플+갱어’ 이야기
#05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산다 – ‘성북마을무지개’ 사람들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