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가족의 탄생 #7>
우리 관계를 반으로 자를 수 있나요 – 레즈비언 커플 ‘이경과 하나’의 이야기
‘피가 섞이지 않아도 괜찮아.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이라면 가족이 될 수 있어.’
2006년 5월 개봉한 영화 <가족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그로부터 10년 간,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가족구성에 대한 이야기는 2006년 가족구성권연구모임부터 2013년 김조광수·김승환 부부 결혼식에 이은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이하 가구넷)의 출범, 그리고 최근 동성혼 불복 소송에 따른 심리까지 험난하지만 다부지게 계속돼 왔죠.
그럼에도 ‘종북게이’, ‘골수 페미니스트’ 등의 용어가 난무하며 혐오가 판치는 게 현실입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요원하고, 성소수자를 포함한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은 좌초됐으며, 한 지자체의 성평등기본조례에서 성소수자 관련 조항은 삭제됐습니다. 이러한 차별과 혐오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가시화를 통한 존재 드러내기와 당연한 권리 주장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이에 친구사이에서는 성소수자 가족공동체를 위한 제도적, 사회적 변화요구에 앞장서는 가구넷과 함께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담은, 성소수자 가족공동체 당사자 연재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7번째 이야기는 활동과 연애를 동시에 하면서 바쁘지만 항상 함께하는, ‘이경과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습니까.
제 평등권을 반반으로
자를 수 있냐는 말입니다.
유력 대선후보면 대답을 해주시란 말입니다.
왜 이 성평등 정책 안에
왜 동성애자에 대한 성평등을 포함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시절이 하 수상하여 한 나라의 대통령과 최측근 민간인이 짜고 친 고스톱에 온 국민이 놀아난 틈을 타, 다음 정권을 노리는 사람들이 느닷없는 공약으로 마치 원래 그래온 듯양 위시대는 모양새가 이어지고 있다. 거기에 유력 대선후보라는 사람이 제발로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찾아가 “성적지향까지 포함한 차별금지법은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뉴스는, 보편적 인권을 바라는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기 충분했다. 언제까지고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하고 우리 인권은 ‘나중에’ 얘기해야 한단 말인가.
이에 분연히 나서서 우리의 목소리를 담아 저러한 뜻을 전달한 사람이 바로 이경이다.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자리에는 그녀가 있었고, 어렵고 힘든 길을 마주하면서도 이경은 지치거나 밀려나지 않고 함께 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 곁에는 소중한 사람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새 3년하고도 반이 넘는 인연을 맺게 된, ‘이경과 하나’ 커플이 이번 7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이다.
저는 원래 만나서 같이 살자는 얘기를 되게 오래 전부터 했던 것 같아요. 왜냐면 제가 혼자 살게 된 게 사귄지 1년쯤 된 시기였거든요. 그래서 혼자 사니까 이경이 들어오면 되겠다고 꼬셨는데, 확신이 없었는지 좀 더 있다가 집에 들어오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많이 싸웠던 것 같아요. 주말 같은 경우엔 좀 같이 있고 싶은데… 한번은 토요일에 왔다가 바로 집에 간다고 그래서 크게 한번 다툰 적도 있어요. [웃음] | 하나
작년 10월부터 동거하기 시작했어요. 사귄지 3년 3개월만인데, 그 동안은 서로 시간될 때 보곤 했지만 그게 잘 안됐죠. 일에 치여서. [웃음] 사실 확신이 없었던 건 아니고, 엄마랑 그렇게 친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엄마가 혼자 지내니까 그게 걸렸던 거죠. 그것도 그렇고 저는 본가에 살고 있었으니까 그걸 떠나서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산다는 게 적응이 잘 안될 것 같다는 우려도 있었고요. 그리고 제가 집에서는 너무 가부장이니까. 반면 하나는 살림부치거든요. [웃음] 저랑 패턴이 좀 안 맞지 않을까 했죠. 어쨌든 집에는 대충 핑계 대고 나와서 살게 됐어요. | 이경
그 동안 만난 보통의 레즈비언 커플들이 동거 중이었기에, 두 사람의 관계도 어떤지 제일 먼저 궁금했다. 동거가 관계맺기의 연장선에서 서로를 더 가까워지게 하는 삶의 형태라는 점에서, 이르지 않게 한 발짝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함께 하게 됐다는 마음씀씀이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같이 살면 해보고 싶었던 게 친구들 집에 초대하는 거였거든요. 두어번 집들이하고 나서는 힘들고 방전돼서 못하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웃음] | 이경
동거 시작했을 때가 백남기 농민 돌아가셨을 때였거든요. 서울대병원에서 집까지 오는 건 거리도 멀고 힘드니까 걱정이 됐는데 그래도 결심을 했는지 집으로 들어오더라구요. 그때부터 토요일이 없었기 때문에 집들이는 거의 일요일에 하고 바로 다음날 출근해야 되니까 힘들었던 거죠. | 하나
함께 사니 서로 말친구도 되어주고 한잔 두잔 술이 늘었다는 얘기에 무릎을 탁 치면서, 살도 쪘다는 말에는 한숨을 잠깐 쉬면서, ― 필자도 동거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기에 ― 그래도 동거의 이로움을 막 찬양하고 나니 뭔가 부부클리닉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동안은 본가에 살면서도 ‘이 집은 내 집이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게, 내 생활이 쭉 이어지면서 집에서의 환경과 섞이는 기분이 아니었거든요. 근데 동거하니까 “오늘 뭐 했어?” 등 서로 물어보고 직장 욕도 하면서 일상을 공유하니 그런 걸 느끼는 것 같아요. | 이경
한편 두 사람에게는 다른 고민이 있었다. 커뮤니티 안에서 만나 같이 활동도 하다 보니, 활동과 연애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함께하는 시간이 대부분 활동으로 점철된 경험들은 그들에게 이중 감정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제는 세트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활동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활동 기간이나 거기에 쏟는 시간 및 에너지 등의 온도차는 있겠지만, 커플이 관계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커뮤니티 사람들과의 친밀감과 감정의 교류는 오히려 득이 더 많음이 분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말에도 일하거나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보니까 만나기 힘들었던 거죠. 시간은 없고 몸은 힘들고. 관계가 데이트하는 걸로는 부족했는데, 거기다 활동이 있으면 데이트와 활동을 동일시해서… 뭔지 아시죠? 내가 오면 하나도 오냐고 물어보고 하나도 온다고 하면 일 시키고. [웃음] 근데 또 하나는 저에게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 된다”고 말하니까 좀 모순이 있긴 해요. 열심히 해야 된다고 하면서 시간을 못내는 거에 대해선 또 별로 안 좋아하니까. | 이경
왠지 동원되는 느낌이야. [웃음] 근데 당연히 더 열심히 해야 되고 지금이 또 다시 언제 올지 모르는 정말 중요한 시기니까,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니까 하라고 하는 거예요. 반면에 집에 오면 또 너무 힘든 일도 있죠 혼자 있으니까. 그럼 좀 짜증도 부리고 화도 좀 내다가 ‘아냐 이럼 안 돼’ 이래요. [웃음] | 하나
서로가 곁에서 지켜보며 활동의 가장 큰 지지자가 되어주는 존재라는 게 느껴지면서도, 같이 커뮤니티 활동하는 커플들 대부분이 겪게 되는 보통의 고민들이 공감으로 다가온다. 결국에는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닌, 모두가 함께 행복하려고 하는 것임을 알기에 서로에게 애인이자 동반자, 존경할만한 동지라는 말이 더 절실히 와닿는다.
단체 활동이라기보다는 지금 일들이 국가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이잖아요. 이 시대에 꼭 해야 되는 이야기들이나 일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게 옆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 정도 도와주면, 예를 들어 집 청소를 한다거나 해서 신경 안 쓰게끔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되게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하게 되는 거예요. 이 사람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죠. | 하나
만나기 전부터 이 사람은 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고백이 이젠 어색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래도 같은 곳에 몸담고 활동하는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었다. 오프라인 커뮤티니 활동이라고는 생전 처음인 하나와, 오래 전부터 관심 갖고 활동해 이제는 혐오세력들도 아는 이경은 어떤 느낌을 좇아 만남을 시작했을까?
행성인(구 동인련) 들어간지 한두달밖에 안된 상황에서 당시 운영위원장이었던 이경한테 둘이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는데 덥석 물더라고요 그걸. [웃음] 그래서 만나서 술 먹고 얘기하는데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너무 재밌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고 난 다음에 ‘아, 이 사람이랑은 그냥 같이 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하나
하나는 처음에 흥산회(주: ‘흥건하게 산을 타는 회원모임’이라는 뜻의 행성인 소모임)로 데뷔했는데, 나오게 된 계기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故육우당 얘기를 했대요. (하나: 난 행성인이 있는지도 몰랐어~) 그 전엔 그냥 혼자 집회 다니는 민주시민의 일원이었는데, 그렇게 흥산회 처음 나와서 간 게 L들이 대거 성지순례한다는 북한산의 ‘여성봉’을 타러 갔을 때예요. [웃음] | 이경
그땐 진짜 처음으로 동성애자 ‘무리들’을 만나러 간 자리여서 깔맞춤으로 입고 신경써서 갔는데 나중에 사진 보니까 그렇게까지 하고 온 사람은 없더라구요. 제가 제일 동성애자 같았어요. [웃음] 암튼 그 전엔 여자애인만 한두명 정도 그것도 큰 용기 내서 만났는데, 이경을 만나고나서 확 바뀌었죠. 사귀기로 한 다음날 홍대에서 첫 데이트때 이경이 손잡는데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요. 처음 있는 일이라. | 하나
손만 잡아도 동성애자라고 생각할까봐 두려웠던 사람들의 시선이, 애인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억눌려 있던 감정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풀리면서 그동안 몰랐던 세상과 접하게 됐다는 하나의 말. 처음 커뮤니티에 데뷔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겪는 상황이라 생각하니 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나만 혼자 잘 살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곁에 있는 사람의 삶을 마주하며 변화하고 ‘함께 살자’는 마음으로 물들게 된다는 건 고마운 축복이자 관계발전의 기회 아닐까.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 이런 커플들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이성애자들도 막 헤어지거나 이혼하는 부부도 많은데 굳이 우리만 더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게 쫌 그래요. | 하나
커뮤니티 안에서의 연애가 어찌보면 안전하고 지지받을 수 있는 관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로 간에 너무 많은 것을 함께 하려다보니 자칫 지치거나 다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과연 두 사람은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어떻게 넘나들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실 행성인 외에는 다른 커뮤니티 활동을 안했기 때문에 행성인 내에서 연애를 하긴 했는데, 이후에는 밖에서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했어요. 근데 일하면서 친해지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대화가 잘 통해야 해서 결국 단체에서 사람을 만날 수 밖에 없었고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어려운 건 좀 있죠. 만약 그러다 관계가 끝나면 되게 어색해지는데 한 명 한 명 다 훌륭한 활동가들이니까 잘 지내야하는 고충이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랑 사귈 때도 과연 길게 갈 수 있을까 막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래도 그땐 몇 살 좀 더 젊었으니까.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또 흘려보내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사귀었어요. | 이경
처음에 만난 사람이 운영위원장인데다가 행성인이 이 사람 나와바리여서 약간 시댁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그때 나라 언니가 했던 말이 “너랑 이경이 만나는 걸 오케이(?)한 이유는 니가 이경이 활동하는 걸 저지하지 않을 것 같아서야”였죠. [웃음] 그렇다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가서 얘기할 수도 없고 해서 어찌어찌하다 아는 언니들 붙잡고 “이경이 날 이렇게 서운하게 했다”고 하면 돌아온 반응이 “참아. 활동이야.”였어요. [웃음] | 하나
이렇게 조직의 희생을 감내하고서도(?!) 지금껏 함께 해왔기에 활동과 연애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던 두 사람. 지금은 두 여성이 같이 사는 모습을 의아해한 이웃의 시선도 아랑곳않고 더욱 단단한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에서 내공이 느껴졌다.
하루는 경비원 아저씨가 지방에서 올라온 우리 엄마한테 “왜 딸내미는 결혼 안 시키냐”고 물어봐서 엄마가 “왜요. 같이 사는 사람 있잖아요”라고 얘기하니까 “아, 그 여자 분이요?”라고 했대요. 이경의 존재를 굳이 언급하는 게 좀 불편하긴 했죠. | 하나
원가족의 지지 또한 성소수자 가족/공동체에게는 큰 힘이 된다. 하나의 성적지향을 어렵게 받아들인 어머니는 중간에서 부단히 노력한 언니와 함께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나오시기도 했고, 하나와 이경을 있는 그대로 안아주셨다. 이경이 엄청 신경을 쓴 만큼 참 좋았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부모모임 끝나고는 넷이서 술을 마시러 갔어요. 하나 어머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었죠. 지난달 여성정책포럼에 문재인 씨가 기조연설하러 왔을 때 제가 외친 영상을 보시고는 “너무 멋있었다”고 하셨대요. 얼마전 차별금지법 제정촉구 기자회견 때는 발언하시기 위해 서울도 올라오셨는데, 전날 저에게 발언문 관련 첨삭해달라고 문자 보내셔서 문맥만 살짝 다듬은 후 고이 출력해 안겨드렸죠. 하나한테는 늘 그런 면에서 너가 용기 있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어머니가 진짜 좋으신 분이라고 얘기해요. 저는 좀 회피적인 사람이고 저희 엄마가 이런 얘기 하는 걸 너무 싫어하니까 서로 다가가지 못하는 상태인데, 좀 떨어져 지내면 뭔가 거리를 두고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하나네 가족을 보면서 들기도 했죠. 하나네 가족이 또 너무 잘해주니까 나도 용기내서 다시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 이경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이 자신의 존재를 오롯이 인정해주었을 때의 느낌은 참 고맙고도 소중한 감정일 것이다. 우리의 만남이 떳떳하고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으며 유대관계가 확실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열리게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커밍아웃의 힘이고,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디 언젠가 이경의 가족도 하나와의 관계를 알고 엄마의 마음이 활짝 열릴 날이 오기를, 그래서 이경의 현실적인 고민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기를 기대해본다.
이미 오래 전부터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두드러진 활동을 해온 이경이지만, 특히나 혼란한 시국을 틈타 스스로 대세라고 자칭하는 대선 후보 앞에서 우리 존재를 알린 최근 사건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하면서도 성소수자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소수의 차별 반대를 위해 필요한 차별금지법 제정에는 반대의 뜻을 표현한 사람에게 또렷한 목소리로 울분을 터뜨린 이경의 당시 심경은 어땠을까.
저는 그때 좀 정신이 없었는데, 그 광경을 영상으로 본 사람들이 더 충격을 받은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사실은 고민을 좀 더 했으면 아마 못했을 것 같은데 그날 얼떨결에 끌려가서 하게 된 거예요. [웃음] 처음에 저는 민주노총 소속 연대단위로 기자회견 하고 가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쪽 사람들이랑 같이 밥먹다 이나라(현 행성인 활동가)가 “니가 그것만 하고 가. 소리 지르는 건 니가 잘 하니까 이건 니가 해야 돼.”라고 해서 처음엔 좀 당황했죠. 거기 가서 어떻게 해야되지 하면서 긴장을 엄청 했어요. 목은 바짝바짝 타고 도대체 나는 여기 왜 왔을까하는 생각이었는데. 20초만 뭐라고 지껄이면 되니까 견디자는 마음으로 있었고, 한편으로는 무례하고 예의없게 보일까봐, 이게 지지받을 수 있는 일일까라는 확신이 없었던 거죠. 그 뒤에는 며칠 동안 댓글들이나 반응들 보면서 곱씹기도 했구요. | 이경
같은 공동체 내에서도 다양한 생각들이 있듯이, 그토록 거칠게 항의하는 방식으로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접근하는 데에 부담이나 반감이 있는 일원들도 있기에 고민과 갈등을 겪었다는 말에 위로와 공감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다수의 침묵과 그 다수 내의 혐오 속에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우리의 존재를 누군가는 그렇게 알려야 했기에, 그의 말과 행동이 뭇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날 이경은 당직이어서 집에 안 들어왔었어요. 그래서 혼자 그 안에서 그 뒤의 생각이 참 많겠구나라는 걱정이 좀 들었는데, 실은 그 영상을 딱 보자마자 느낌이 팍 왔죠. 이건 역사적인 일이고 곽이경이 해야만 했으며 진짜 필요한 일이라는 거, 이게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왜냐면 거기서 사람들이 ‘나중에’를 외치는데, 그거야말로 우리가 겪고 있는 힘든 현실들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거잖아요. 그런 생각이 드니까 ‘그래! 잘했어!’라고 외쳤어요. 항상 느껴왔던 것들을 너무나 그 영상에서 다 보여주니까 참 좋았어요. | 하나
당직이라 회사에 있었는데 그날 너무 잠이 안 오더라구요.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보다는 마음이 너무 무겁고 기분이 안 좋았던 거죠.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심경과 무례함의 여부를 논쟁하는 분위기 때문에 좀 힘들었어요. | 이경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원치 않는 성격이라 이경의 힘듦은 오래갔지만, 곁에서 잘했다며 응원해주고 마음을 다독여준 하나가 있었기에 그렇게 역사는 깊게 새겨졌다. 어디 그뿐이랴. 2014년 12월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을 위한 무지개농성이 있기 전 서울시청에서 항의할 때도, 2015년 10월 대한문에서 여성가족부의 성소수자 차별에 분노하는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가 열렸을 때도 그녀는 그 자리에 존재했다. 결국 우리나라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중요한 순간순간에 이경이 있었고, 그 어려움을 뚜벅뚜벅 걸어온 것이다.
▲KBS 조우석 이상의 혐오발언 후 긴급토론회에 참가한 이경의 모습ⓒ미디어스
심지어 공영방송 KBS의 조우석 이사는 2015년 10월, <동성애·동성혼문제, 어떻게 봐야하나> 토론회 당시 활동가들의 실명을 언급하며 ‘더러운 좌파’라는 비난을 서슴치 않기도 했다. 그 실명 가운데에도 이경이 있었고, 그는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동성애 혐오가 팽배해진 상황이라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성소수자들이 더 많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선은 함께 거론된 욜에 대한 걱정이 먼저 됐고, 저 같은 경우는 남들이 말해줘서 알게 됐어요. 그래서 막 주변에서는 어떻게 해야된다고 추진계획을 내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이런 문제로 막 도마 위에 오르는 게 별로 기분 좋지 않았고 나에 대해서 언제 봤다고, 뭘 안다고 ‘얘는 이런 애다’라는 프레임을 들고 나온 건지 생각하니 좀 싫었어요. 그리고 그가 써놓은 걸 보면 원래 나하고는 좀 다르게 왜곡된 것도 나타나있고, ‘더러운 좌파, 더러운 커넥션’이라고 한 걸 보면 우리는 각종 소수자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부류로 여겨진다는 생각에 씁쓸했죠. | 이경
결국에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왜 노동운동과 함께해야 하는지, 노동운동은 왜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외면하면 안 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기회였다는 이경에게, 민주노총 대외협력국장으로서 일하고 있는 경험들도 들어보았다. (항간에는 그녀가 ‘노동자풍’ 레즈비언을 좋아해서 노동조합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있다.)
2년 반 가까이 대외협력국장을 하고 있는데, 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민주노총 하면 뭔가 경직되어 있고 무거운 조직인 건 분명 맞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변화를 받아들이는 구석도 있어요. 한 번은 세월호 운동을 하다가 만난 동지가 “남자친구 있어요?”라길래 “남자친구는 없고 여자친구는 있는데요.”라고 했더니 “여자는 친구고, 남자는 소개해주겠다”라고 했다가 자기 단체에서 그 얘기 때문에 한소리 들었다네요. 그런 분들이 꽤 많고, 성소수자를 처음 만났다고 하면 “아닐텐데…”라고도 얘기하죠. [웃음] 사실 제가 ‘노동자풍’ 레즈비언을 좋아해서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것도 맞긴 한데, 기본적으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존중받는 거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최근에 해요. | 이경
얼핏 가부장적이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할 것 같은 남성 중심의 조직에서 그래도 이경이 본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덕분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도 큰 기여일 것이다. 2004년 9월 민주노동당 성소수자 준비위원회 발족에도 참여했고, 2015년 7월 민주노총 내규 개정 때는 가족수당 대상에 사실혼 관계에 있는 배우자(동성포함)도 포함시킨 일 등, 노동자이자 여성 성소수자로서 이경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2004년 발족 당시 있었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우리나라 최초 정당위원회라는 의미가 있었죠. 그때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열려있는 느낌이었어요. 정당이라는 데가 의식적인 부분이 있어서 당원들 몇 백명을 대상으로 여기동 동지와 함께 성소수자 인권 교육도 몇 번씩 계속 하니까 달라지는 게 눈이 보였죠. 그런 성과가 지금 잘 연결되고 있지 않은 건 좀 아까워요. 내규에 가족수당 부분은 바꿔야겠다는 제안을 먼저 해서 의사결정위원회에 상정까지 됐는데, ‘그래서 동성까지 포함한다’라는 말이 적절한가, 아니면 ‘이성만 해당된다’라는 말을 없애는 게 좋은가에 대해 엄청 토론이 됐대요. 결국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 말을 명시하지 않는다면 차별구조상 이성만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결론 때문에 넣기로 했죠. | 이경
그 후 가족수당을 사실혼 관계에 있는 커플들이 많이 신청한 결과만 놓고 봐도, 성소수자에게 좋은 것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또한 2016 퀴어문화축제 때 민주노총 사상 처음 공식적으로 성소수자 참가단을 꾸리고 활동할 때도, 민주노총 로고를 무지개로 바꾸는 과정에서 의미부여에 대해 고민했다는 에피소드는 성소수자 운동과 노동운동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 2016 퀴어문화축제 때 민주노총 성소수자 참가단의 모습
여성 노동자로서 하나가 겪은 일은 한편으로 노동현장에서 아직 만연한 여성 차별을 절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기술쪽 일은 남성이 하는 분야라는 인식 때문에, 같은 노동자이기 이전에 여성성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전기자동차 만들고 A/S 나가는 일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 자동차 정비현장에서 일할 때는 “하이힐 신고 일해라”, “그래야 우리가 보는 재미가 있지”라는 등의 얘기들을 좀 들었죠. 소위 미인계를 써서 하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분위기였어요. 알고보면 좋은 동료들이어서 화가 났다기보다는 막 “그럼 당신은 구두 신고 일할 거냐” 등으로 대꾸했어요. 반면 손님들 중에는 더 잘 하는 남자 정비기사 데리고 오라고 하거나 쓸데없이 말을 건다든지 하는 등 쉽게 보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 하나
여전히 노동현장 한쪽에는 여성혐오가 존재하고, 반면 또다른 쪽에서는 여성의 능력 — 어떤 경우에는 여성이 성차별을 극복하고 훌륭한 노동자로서 인정받기 위한 욕구일 수도 있고, 남성이 봤을 때는 성적인 매력일 수도 있는 — 에 기대어 이윤을 챙기려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게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그렇기에 다함께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고 바꿔나가려는 노력이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그 노력은 성별과 직급 등을 떠나서 모두의 몫임이 자명하다.
예전 위원장한테 들은건데, 성소수자 관련 무언가를 할 때 제일 쉬운 건 조직의 규약을 바꾸는 거라고 하더라구요. 형식미가 있으니까. [웃음] 그리고 교육도 가능하긴 한데, 가장 어려운 건 홍보라는 거요. ‘우리는 성소수자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각급 조직에 보낸다고 하면 항의전화가 빗발칠 거라는 게 현재 상황이고 40대 남성 조합원이 가장 많은 현실에서 그분들의 의식이 쉽게 바뀔지가 의문이라는 거죠. 예전에 어떤 분은 사람들한테 영화 <종로의 기적> 보러가자고 했다가 누군가가 ‘게이들끼리 섹스하는 거 보기 싫다’고 해서 뭔 소리냐며 억지로 끌고갔는데, 엔딩 크레딧 올라갈때 그 사람이 울고 있었다는 일화도 있어요. [웃음] 그런걸 보면 저는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기회가 너무나 면적이 적어요. 근데 저번에 유성 갔을 때 김조광수 감독님이랑 행성인들이랑 뒷풀이도 했는데 그분들이 영화 <마이 페어 웨딩> 볼 때 솔직히 불편했다고 하더라구요. 그 접촉면이 계속 생기면 우리도 괜히 점잖은 척 하지 않고 다 친해질텐데 말이죠. 그분들이 “나중에 만나면 그전 같은 생각을 안 할 것 같고 자기 자녀라고 생각하면 역시나 마음이 아프긴 하니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고 나중에는 얘기했어요. | 이경
노동운동과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정말 중요한 운동인 것 같아요. 이게 따로 떼서 볼 수 없는 게, 사람이 노동을 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 안에서의 성소수자 문제, 여성 문제들을 반으로 자를 수 없잖아요. [웃음] 그렇기 때문에 성소수자 안에 노동권이라는 게 정말 중요한 이슈고, 이걸 어떻게 이슈를 좀 더 크게 만들면서 이끌고 나갈지가 중요하죠. 그리고 내가 실제로 일하면서도 엄청 많이 문제를 겪고 변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같이 의논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너무 좋은 것 같아요. | 하나
(유성기업의 직장폐쇄 및 노조탄압에 맞서 투쟁하다 죽은) 한광호 열사 추모 문화제를 어제 했어요. 노조 운동 열심히 하려고 했던 한 명의 노동자가 죽었는데, 353일만에 하늘나라로 가기까지 있었던 이 사계절에 이른 투쟁을 돌아보는데 너무 눈물이 난 거죠. 저는 노동운동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죽음과 연관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거 보면 쌍차(쌍용자동차 직원해고에 따른 파업 사태) 때도 그렇고 성소수자들이 생각이 나요. 노동자들이 요즘에는 괴롭힘 당하고, 삶에서 밀려나고, 낭떠러지까지 가는 상황에서 죽음을 택하게 되는 걸 많이 봤고, 그게 성소수자 운동을 해온 저 같은 사람에게는 공감대가 있는 거죠. 그래서 그 공감대가 확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 이경
▲각자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모습
이렇게 현실에서의 삶은 참 녹록치 않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많은 이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꿈꾸는 것은 자유이기에 무한한 상상 너머 두 사람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세계 일주요. 1년 동안 모든 걸 탕진하고 오겠다는 꿈이죠. [웃음] 옛날에는 레즈비언으로 혼자 산다고 생각하면 ‘쪽방촌에서 고독사’ 이런 거에 엄청 꽂혔었어요. 너무 막연했던 두려움이었는데 지금은 현실적인 두려움을 떠나 하나도 안 무서워요.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하나
5년 후에 같이 인생에 길이남을 여행을 가자고 했어요. 여행을 서로 좋아하고 여행 가면 너무 잘 맞는 좋은 여행친구니까 5년 후에 집세 빼서 모든 걸 다 털고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죠. 사실 미래에 엄청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에요. 저는 그리고 하나랑 6살 차이라 ‘평상시대로라면 내가 먼저 가겠지’라는 생각이 있어서 별로 걱정을 안 하는데, 어쨌든 한 번 떠나보내 봤잖아요. 상실이 어떤 건지 알고, 다시 겪고 싶지는 않은데 한편으로는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되게 길게 미래를 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언젠가 누군가를 상실하게 될 때는 어떨까 하는 생각도 사실 해봐요. 그땐 이미 많이 늙어있을 때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살겠죠? [웃음] | 이경
두 사람 곁에는 이제 든든한 동반자가 있기에, 이민이든 입양이든 언제나 함께라면 불가능은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느새 구체적으로 몇 가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단다. ‘우리는 재산을 굳이 많이 축적하기 위해 현재의 뭔가를 버리거나 기부를 줄이지 말자’는 규칙도, 집을 키울 때 가장 큰 요소로 이경의 ‘담배 피울 베란다만 있으면 된다’는 의견과 하나의 ‘화장실이 꼭 두 개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다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도 어쩌면 평범한, 새로운 가족의 모습 아닐까.
외국에 가서 동성애자들이 인정받고 권리도 존중받는 나라에서 살면 어떨까라는 말을 하나가 꺼냈는데, 저는 단 한번도 외국 가는 생각은 안 해봤고 내 나라 내 땅이 좋다고는 했어요. 근데 요즘엔 약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어차피 인생은 한 번 사는 건데. 그런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죠. 그래서 되게 다양한 생각을 해보고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니까 재밌고요. 예전에는 나이도 더 젊었고 그래서 그런지 먼 미래가 엄청 추상적이었는데, 지금은 하나 덕분에도 굉장히 삶이 안정적이고 정착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이경
떠나보낸 사람만이 상실의 아픔을 안다는 말처럼, 예전 파트너를 병으로 떠나보낸 이경의 마음에는 이제 딱지가 생겨 잘 아문 듯한 느낌이다. 물론 한때는 ‘나하고 있으면 다 불행해지나’라는 이상한 생각도 할 정도로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지만,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있는 사람을 만난 덕분에 불투명한 미래가 환해지고 안심이 된다는 게 무척 반가웠다.
결혼식도 하고 싶고, 외국에서 애기를 입양해 키우고 싶기도 해요. 아이를 키워보는 게 사회에게도 좋은 것 같고요. 너무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 하나
우리가 세계 여행을 갈 때가 되면 사귄지 10년쯤 돼요. 그래서 그때까지 저도 가족과의 관계를 장담할 순 없지만 잘 정리하고, 결혼을 축의금을 받지 않는 걸로… | 이경
응? 아직 이건 합의 안된 걸로. 축의금 안 받는다는 이경이 말은 빼주세요. [웃음] | 하나
이건 결혼하기 전까지 합의할 거예요. [웃음] 어쨌든 결혼하는 거는 싫다고 얘기했었는데, 요즘에는 계속 저한테 “우리 결혼 한거야? 한거지?”라고 물어봐서 “한 거로 치자”고 얘기는 해요. [웃음] 아직 운동권 정서가 있는지 막 결혼을 주장하면 그럴 것 같아서 우리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어쨌든 우리는 가족이 이제 되어가고 있다고 느껴요. 가족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아직까지는 꽤나 성공적이라는 느낌이에요. 결혼식을 할 때는 낭만적인 결혼을 왜 꿈꾸면 안 되나 이런 생각을 최근에 했고, 드레스는 안 입을 건데, 한번쯤은 사람들과 인생을 정산하는 자리를 갖고 싶어요. 뭔가 막 축하를 받고 싶다기보다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이렇게 살아왔다는 걸 보여주자는 약속은 했어요. | 이경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경&하나 가족과의 이야기는 이렇게 푸근하고 유쾌했다. 국민 손으로 시대가 바뀌고 무심코 세월이 흘러도 그들의 앞날에 건강과 행복이 언제나 함께하길 두 손 모아 빌며, 끝으로 각자가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를 한 마디로 던져달라는 부탁을 건넸다.
항상 내가 집에 가면 내 편이 있다는 거? 그게 되게 마음을 따뜻하게 해요. 어제 하나가 술 먹느라 연락이 안됐을 때도 ‘집에 가면 하나가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웃음] | 이경
질문이 너무 어렵네요. [웃음] 그냥 뭐 가족이란. 그냥 사는 거죠. | 하나
<新 가족의 탄생> 연재 순서
#01 사랑에 차별이 있나요 – 레즈비언 부부 ‘낮잠과 유다’ 이야기
#02 무지갯빛 마음이 모여 사는 곳 – ‘무지개집’ 사람들 이야기
#03 별처럼 반짝이는 인연을 맺다 – 게이 부부 ‘플플달 제이&크리스’ 이야기
#04 닮은 듯 다른, 믿음 안의 사랑 – 퀴어 커플 ‘도플+갱어’ 이야기
#05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산다 – ‘성북마을무지개’ 사람들 이야기
#06 15년의 사랑, 벅차게 Congratulation – 게이 커플 ‘승정&정남’의 이야기